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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를 만나다-//2006년 가을호
  
 작성자 : 여성회
작성일 : 2006-11-07     조회 : 1,275  

조경애, 조성무, 까치언니로 기억되는 그녀






단발 파마머리를 한 웃음을 가득 담은 얼굴이 방으로 들어섰다. 아직 옛 모습 그대로 예쁘다. 20여 년 전 계대 앞 어느 찻집에서 그녀를 처음 보았던 기억이 확 살아났다. 내가 대학교 2학년 때던가... 허리까지 길게 흘러내리는 파마머리를 흔들며 친구들과 우르르 들어오는 그녀를 한 선배가 가리키며, 미대에 다니는데 학생운동을 한다는 이야기를 슬쩍 해주었었다. 인사도 없이.
그녀를 다시 본 것은 1988년 겨울, 남문시장 안 상가 지하, 대구여성회 사무실에서였다. 나는 무크로 발행하던 『떼·풀이』 연극신문을 가져다주러 갔었고, 사무실로 들어서니 여전히 긴머리를 뒤로 묶은 그녀는, 경찰이 사무실을 기습하여 서류를 뒤집어 놓았으며 그걸 막느라 몸싸움을 했노라는 상황을 설명하며 흥분해 있었다. 그때 그녀는 한국여성운동사에서 큰 획을 그었던 사건이자 성폭력 특별법을 제정을 앞당기게 했던 강정순씨를 상담하고 지원하고 있었다. 폭압적 권력에 대한 분노와 두려움이 그 공간에 그림자처럼 있었지만, 그 과정이 세상을 변화시켜나가는 또 하나의 단서가 될 줄 우리는 그때 미처 몰랐다.

“86년도였지 아마. 숙자언니, 나, 계대 앞에서 주점을 하던 박난희랑 몇 명이서 길에서 만나 이야기를 하다가, 우리 여성운동 같은 거 한번 해보면 어떻겠냐는 얘기를 했고, 학 생운동 안에서도 여성에 대한 폭력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 한번 해보자 이래서 준비모임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어려웠지만 그 끈끈한 정 같은 게 있었고, 차비도 겨우 되는 활동비를 받으면서도 분위기 있는 찻집은 다 찾아다니고 하던······. 그때는 낭만이 있었던 것 같아”

끈끈한 정이 그리웠노라고 말하는 그녀의 눈이 아련해진다. 그런 깊은 인간관계 같은 게 없어서 그런지 그 후 일산으로 이사를 가서 고양여성민우회 활동을 잠간 했지만 모래알처럼 돌다 활동을 접었다고 한다.

“결혼하고 3년 후 쯤 처음 남편에게 뺨을 맞았을 때····· 상담사례집을 가지고 공부를 하 고 피상적으로 피해여성들을 상담했지만······ 내가 다른 여성들에게 상담을 했는 게 있는 데, 적어도 내가 맞고 살았다는 말을 들을 수는 없잖아요”

일상의 삶에 빠져서 운동을 잊고 살았다는 그녀는 아직도 여성운동가로서의 열기를 품으며, 풋풋하고 싱그럽다. 운동을 잊고 살았다고 말하지만 그녀가 말하는 자신의 삶은 예사롭지 않다. 단체 운동이나 함께 하는 무리 속에 자신을 슬쩍 편승하는 일은 오히려 쉬울 것이다. 그보다는 사적인 공간, 특히 가부장 이데올로기가 가장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들어나는 가족 안에서, 여성운동가로서 자신의 신념을 실천하는 것은 얼만 어려운 일인지······. 그 속에서 혼자 받은 상처는 그만큼 더 크기도 하고, 해서 그녀가 부끄럼 타며 내놓은 기억이 내게는 인권과 평등과 폭력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자신의 삶을 걸고 저항했던 징표로 읽힌다.

“이 자리가 내게는 참 부담스러운 자리였어요. 여성회를 생각하면 빚을 진 것처럼 늘 마 음이 무겁죠. 하지만 이렇게 후배들을 만날 수 있어서 얼마나 기쁜지, 또 아직 친구 정원 이가 여성회 활동을 한다는 것이 참 자랑스럽고 고맙기도 하고······이렇게 올 수도 있 고·····다시 대구로 오고 싶어”

저녁 무렵에 만나 가게 문을 닫으니 나가 달라는 주문이 있을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지난했던 삶들을 말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고, 결국 우리는 2차를 갔다. 처음 말해보는 삶의 부분들과 미래를 생각하며, 가벼운 긴장과 흥분으로 밤이 깊을수록 그녀의 눈빛이 더 또렷해진다.
이야기를 나눌수록 나는 그녀가 여성운동가로서 또 하나의 작은 봉우리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커진다. 스스로도, 누구도 자신의 삶에 이름을 붙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모래알로 남아 있는 게 아닐까! 서로에게 물을 주고 가슴을 적시고 서로 녹아들 때, 서로의 이름을 불러줄 때, 그렇게 우리는 작은 봉우리가 되어갈 것이리라.
다른 이유들도 있었겠지만 예쁘기 때문에 고등학교 시절 따돌림을 당하고, 학생운동을 할 때 프락치로 오해를 받았고, 대구여성회를 만들고 활동을 하던 그 때도 프락치란 말을 들어야 했던 사람! 그 상처들이 다른 사람의 아픔을 조금은 돌아볼 줄 알고, 지금 아이들을 가르치고 사람을 만나는데 큰 도움이 된다는 경애언니. 조승무, 혹은 조 까치. 그런 아픔이 없었다면 거만하고 웃기는 인간이 되었을 거라며 웃는 그녀는 여전히 아름답다.

어쩌다 아름다움이 그녀에게 상처가 되었을까? 우주를 채우는 한 존재, 그 자체로 이해되기 보다는 예쁜 여자로 평가되고 대상화되는 세상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 자체가 상처이기 때문일까······.

이은주 /대구여성회 편집위원장




< 낙 서 >

가슴 한 켠에 파편하나를 묻고 살았다.

뒤척일 때마다 때론 그것이 비수가 되어 가슴을 찌르곤 했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이제 중년의 나이로 오늘을 살고

지나간 시간에 대한 미련(?)은 먹고 사는 것에 묻혀 버렸다.

그러나 여. 성. 회 !

그, 이름 떠올리면

순박하고 투박한 시골 촌노의 따스한 손길 같기도 하고

언제든지 짐을 내려놓을 수 있는 친정의 든든한 언덕 같기도 하고

동시에 소리 없이 파고드는 회한 같기도 하다.


열정과 순수가 있었다면

또한 오류와 시행착오가 있었다면

여성회에서 만난 모든 그네들과 함께 한 시간들이 아니었을까?

그네들!!!!

다정한 선배, 친구, 후배 잘들 계시리라!

삶의 원주율이 워낙 협소한 탓인지라

목례 한번 나누지 못한 시간 속절없지만

언제나 여성회라는 이름 속에서 우리는 만나지고 기억되길······.

2006, 8월에